욕조문답(浴槽問答)

글/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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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유성에서 열릴 학술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택시를 타고 서둘러 도착했으나, 피치 못할 주최 측 사정으로 두 세 시간 연장을 해야 했다. 주최 측에서는 세미나가 열리기 전까지 온천 욕을 즐기라며 선심 쓰듯 온천탕 티켓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때마침 간단히 세수만 하고 나온 참이라 온몸이 찌뿌등한 상태였다.주최 측의 피치 못할 사정을 고마워했다.
호텔 안에 있는 온천 탕으로 서둘러 입장했다. 온천탕 분위기는 시설 좋은 일반 목욕탕과 비슷했고, 조금 다른 점은 온천욕을 즐기는 사람들 대부분 아랫배가 툭 튀어나온 중년들이 많았다.
나는 언제나 대중탕에 갈 때면 한용운님의 글 ‘욕조문답(浴槽問答)’을 떠올린다.

“자네 목욕 다녀왔는가?”
“목욕 갔다 왔습니다.”
“목욕 잘 하였나?”
“목욕은 잘 하였습니다.”
“목욕하는 데도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옳게 하였나 모르겠네.”
"저도 처음이라 잘 알 수가 없어서 남하는 대로 하였지요."
-한용운 `욕조문답에서-

대중탕에 처음 갔을 때는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았다. 소도시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는 자취생 신분으로 일요일 혼자서 대중탕에 가게 되었다. 처음 가본 대중탕 분위기는 상상했던 것보다 그리 낯설지 않았지만, 대중탕에서 목욕 지식이 거의 없어 남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수증기가 가득한 욕실 안은 여럿의 같은 동성들이 알몸인 상태에서 때를 밀고, 몇몇은 더운 공간에 들어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일부러 땀을 내는 등 목욕탕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들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남들이 목욕하는 대로 따라하는 것을 눈치챌까 조심스레 흘깃거리며, 특별한 방법이 있겠나 싶어 고향 개울가에서 흙 묻은 장딴지 닦아내듯 깨끗하게 닦았다. 한참 동안 목욕지식(?)을 연구하는 데,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 빨래를 한 가방 들고 와 급히 빨래를 하고 있었다. 빨래하는 남자는 긴 머리 모양과 빨고 있는 옷 모양새로 보아 근처 전문대학 학생쯤으로 보였다. 빨래를 다 마친 남자는 다시 빨래를 땀을 빼는 더운 공간 안에 있는 나무의자 위에 널어놓고 건조까지 시켰다. 목욕을 하면서 속으로 도회지 사람들이 이렇게 빨래를 쉽게 하는 모습을 보고 미리 목욕탕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오지 못함을 후회했다.

자취생이 가장 하기 싫은 일이 빨래다. 추운 겨울 수돗가에서 겨울옷을 세탁하는 일은 고향 어머니 생각이 절로 날 정도로 힘이 든다. 또 남자들이 빨래를 할 때는 물을 헤프게 쓴다. 그래서 주인집 아줌마한테 수도세가 많이 나온다고 혼나기 일쑤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자취생들 여유 시간을 빨래하는 시간에 투자 하다보니 일요일은 낮잠 한번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그렇다면 대중탕에서 목격한대로 아주 쉽게 빨래를 한다면 옷감 때도 잘 빠질 뿐더러, 목욕하는 시간에 빨래도 하고 일요일에 꿀맛 같은 낮잠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이것이 도회지 사람들의 문화혜택(?)이구나’ 하는 생각에 왜 젊은 사람들이 시골을 등지고 도회지로 떠나는가를 알 수 있었다.-_-; 한번 경험으로 대중목욕탕 분위기를 파악한 듯 기뻤다. 다음부터는 반드시 빨랫감을 가지고 목욕탕에 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 다음주 일요일이 되었다. 일주일 동안 벗어 던진 빨래를 시골에 내려 갈 때 가지고 다니는 청색 가방이 터질 정도로 불룩하게 담아서 목욕탕으로 향했다. 이미 도회지 목욕탕 분위기를 파악한 바, 서슴없이 빨래를 들고 목욕탕 내부로 들어가 목욕보다는 빨래가 먼저라는 생각에 한쪽 구석에서 여유 있게 빨래를 시작했다.

목욕탕 물로 빨래하는 일은 하나도 힘이 들지 않았다. 옷을 벗고 빨래를 하니 빨래 할 때 입고 있는 옷이 젖을까봐 조심스레 할 필요도 없고, 그냥 샤워기를 틀어 놓은 채 헹구면 되는 최신식 세탁기나 다름없었다.
한참을 빨래하는 일에 몰입하고 있을 쯤, 검은 빛깔 팬티를 입고 욕실에 들어온 남자의 욕지거리가 들렸다. 빨래를 하고 있던 내 눈길은 당연히 욕지거리를 하는 남자에게 향했다. 순간 방금 짓거린 욕이 나한테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이유로 욕을 했는지는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와 울려 퍼지는 소리 때문에 제대로 듣지 못했으나 내게 하는 욕임이 틀림없었다. 급기야는 달려와서 빰을 후려쳤다. 벌거벗고 얻어맞은 적이 처음이라 무척 당황했다. 무슨 잘못을 해서 얻어맞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빰을 때린 사람은 나보다 서너살 많은 목욕탕 주인 아들로 동네에서는 주먹 꽤나 날리는 건달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괜히 건달 녀석이 주먹 자랑하느라 그런 줄만 알고, 다짜고짜 대들고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채 한판 붙어 볼 참으로 씩씩거렸다. 그런데 주위에서 목욕하고 있던 사람들 눈초리가 심상치 않음을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옆에 있던 백발 노인네가 허벅지 때를 밀며 중얼거리는 내용이 목욕탕에서 빨래하는 것에 대한 잘못을 지적했다.

서둘러 빨래를 챙겨들고 목욕도 못한 채 때가 불어터진 몸을 이끌고 목욕탕을 도망치듯 빠져 나왔다. 한용운님의 ‘욕조문답‘을 이전에 접했다면 그러한 실수를 했을 까?

2

이제는 도회지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고 자부를 했다. 온천탕 역시 면단위 동네 목욕탕 들어가듯 자연스럽게 문을 밀고 들어섰다. 그런데 최근 들어 목욕탕에 갈 때마다 당혹스러운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 나라 남성들의 소중한 곳(?)을 보호하고 있는 팬티 빛깔에 변화가 왔기 때문이다. 얼마 앞서 고향 친구녀석과 목욕탕에 갔을 때, 친구녀석이 아직도 하얀 팬티를 입고 다니는 내게 촌스럽다고 나불거렸지만, 무던히 하얀 팬티를 즐겨 입고 다녔다.

어릴 적에 빛깔이 들어간 팬티를 좋아하기는 했다. 언젠가 어머니가 사다준 노르스름한 색동 팬티를 입고 학교에 간 적이 있었다. 친구들은 체육복 갈아입을 때 색동팬티를 보고 여자 팬티를 입었다고 놀렸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여러 빛깔이 들어간 팬티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나는 하얀 쌍방울팬티나 백양팬티를 즐겨 입는다.  빛깔이 들어간 팬티보다 흰색 팬티가 위생적이고 부드럽다.  또 옷감에 염색을 하게 되면 땀의 흡수력과 부드러움이 덜하다. 또 빛깔 있는 팬티를 ‘미친년 빤스’라는 소리를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릴 적에 놀릴 때는 언제이고, 지금은 거꾸로 하얀 팬티 입고 다니는 몸둥아리가 촌스럽다고? 촌스럽다는 기준이 어떻게 매김되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평범하게 사회생활하는 친구 녀석이 촌스럽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보통사람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고 볼 수 있다.

 온천탕 탈의실에 있는 사람들은 나이를 막론하고 유명한 속옷 회사 색동팬티를 입고 있었다. 혹시나 하얀 팬티를 입고 있는 사람이 없나하고 목욕하는 도중 계속해서 탈의실 쪽을 응시했다. 동네 목욕탕에서는 가끔씩 한 두명 정도 하얀 팬티를 입은 사람을 목격하면 반가웠는데, 온천탕에서는 목욕이 끝날 때까지 한 명도 없었다.

온천욕을 가볍게 마치고 탈의실에서 옷을 주섬주섬 입고 있을 때였다. 사람들이 하얀 팬티를 입고 있는 모습을 흘깃흘깃 쳐다보고 있었다. 또 그 가운데 한 명이 뒤에서 유심히 관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세미나에 같이 참석하는 사람으로 토론 주제에 반대 의견을 가지고 참가하는 자였다. 같은 분야를 공부하면서 평소에 자주 마주쳤지만, 한번도 말을 건네거나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다. 나보다 한 두살 많고 상당한 전문 지식과 꾸준한 자기 개발에 정진하고 있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도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있었다. 눈빛이 마주치면 애써 피하는 모습이 역력하였고, 입고 있는 팬티는 진달래꽃 무늬가 들어간 팬티였다.

온천욕을 끝내고 시간에 맞춰 세미나 장에 입장했다. 세미나는 자연스럽게 진행이 되었다. 세미나가 마무리 될 즈음 온천탕에서 팬티를 흘깃거리던 자가 마지막 주제 발표를 하고 있는 내게 난데없이 세미나 주제와는 거리가 먼 내용의 질문을 퍼부었다. 미뤄 짐작하건대 온천탕에서 싸구려 하얀 팬티를 입고 있으니까 깔본 모양이다. 타고 다니는 자동차만으로도 사람을 평가하는 세상인 것을 보면 짐작이 빗나가지는 않았으리라.

이미 토론 주제가 결정된 세미나여서 절반 이상은 짜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상대방에게 불쾌한 질문은 하지 않게 마련이다. 밀려오는 불쾌함을 억누르면서 답변을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진행되는 세미나 분위기가 딱딱해 한번쯤 공기 전환을 시키려던 참이었다.

“아, 예. 아까 온천탕에서 진달래 꽃 무늬 팬티를 입고 계셨던 분이시군요?”
“?”
“제가 목욕탕 지식이 없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00선생님은 남자가 쪽팔리게 여자팬티를 입고 다시십니까?”

잠시 뒤 사람들의 박장대소(拍掌大笑)가 이어졌다.

그러나, 며칠 뒤 그는 나를 모욕죄로 경찰서에 고소를 했고, 경찰조사에서 조사관들과 팬티이야기를 수없이 나누게 되는 일을 겪었다. 결국 담당 경찰관이 두 명에게 팬티 한 장씩 사주는 조건으로 화해하여 없었던 일로 해결되었고, 그 이후 꽃무늬 팬티와 나는 같은 분야에서 8년째 공동연구를 하며, 현재까지 훌륭한 학술파트너로 발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