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서 열이 약간 오르기 시작했다.
주인이 풀밭에 나를 묶어 놓고 해가 지고 어둠을 거쳐 해가 뜰 때까지 나타나지 않아 풀밭에서 밤새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겨울에 태어나서 왠만한 추위는 견딜 수 있었지만 잠자리가 아닌 곳에서 불안한 시간을 보냈던 탓이었다.

 

주인은 오전 내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뒷짐만 지고 왔다 갔다 했다. 풀을 던져 주면서 소리도 지르지 않고 나를 세게 끌지도 않았다. 이마와 뿔을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옆구리에 붙어 있는 탑세기를 털어주는 자상함을 보였다.염소가 된 화가

 

하루 일과가 풀 뜯어 먹는 일 이외에는 변한 것이 없는 하루였지만, 주인은 내가 밤새 추위에 떨어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이 많이 아프지는 않았지만 주인에게 엄살을 피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주인이 던져주는 씀바귀도 일부러 먹지 않았다. 어차피 주인이 나타나기 전에 새벽부터 풀들을 실컷 먹어서 배는 고프지 않았다. 몸이 아파 아무 것도 안 먹는 것처럼 행동했다. 일부러 불쌍한 표정을 만들어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주인은 잠을 잘 때와 먹을 때는 잘 건드리지 않았고, 먹지 않고 빈정거리고 있으면 마구 혼내는 편이었다.

 

오늘은 내가 먹지 않고 있어도 혼내지 않았다.
나의 꾀병은 잘 통했다.
주인은 풀 뜯어 먹는 모습을 가장 좋아했었는데, 풀을 먹지 않고 있으니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주인은 계속 서성거렸다. 갖가지 풀을 교대로 갖다 주면서 유혹했지만 나는 끝내 주인이 주는 풀을 먹지 않았다.

점심 때가 지났을까?


처음 보는 인간 한 명이 주인과 함께 나타났다. 처음 보는 인간이었지만 경계심은 들지 않았다. 나를 해치러 온 인간은 아니었다.

 

인간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모든 인간들에게서는 살기가 어김 없이 뿜어져 나왔다. 주인에게서도 처음에는 살기가 느껴져 경계를 했었다. 주인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살기는 최근에 많이 없어졌지만, 처음 보는 인간들에게서는 반드시 살기가 전해진다.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살기가 더욱 확실하게 느껴질 때는 인간들이 나를 바라보면서 입으로 이렇게 중얼거릴 때였다.

 

"염소가 정력제라는디..."

 

주인과 함께 나타난 인간에게서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주인보다 더 자상한 눈빛을 보였고 처음 보는 인간이었지만 잘 알고 지내던 인간처럼 친숙한 인상이었다.


친숙한 인상의 인간은 곁으로 다가오더니 내 몸 여기저기를 만지고 검은 줄을 귀에 꽂고 배에 무언가를 붙여보는 특이한 행동만 했다. 아주 특이한 인간이었다.

 

저 인간은 누구이고 주인은 왜 저 인간을 데리고 왔을까? 궁금했다./숲(염소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