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보훈문예작품 수필부문 최우수상 수상작

자(엄사리)

 

 

 언제나 6월 호국보훈의 달이 오면 가슴이 뛴다. 올해는 유난히 가슴이 일찍 뛰고 있다. 천안함 피복 사건이 있은 지 벌써 1주년도 흘러가고 있다. 종전 아닌 휴전의 상황에서 이렇게 우리 군인들이 전쟁을 예방하기 위하여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다 운명을 달리했으니 이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보훈가족으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심정일 것이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보훈가족으로 살아온 지 벌써 4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다. 그렇게 잘 생겼고 멋있었던 둘째오빠가 이역만리 베트남 전쟁에서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다 그만 전사하고 만 것이다.

 

 8남매 중 둘째오빠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동네의 어른들과 학교 선생님들께서도 칭송이 자자할 만큼 인물과 인성이 빼어났던 오빠였다. 오빠가 장교로 임관하던 날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시던 아버지의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생생하건만 지금은 둘째오빠도 아버지도 이 세상에 안 계신다.

 

 44년 전 27세의 젊은 장교는 월남파병을 자원하여 맹호부대 소대장으로 이역만리 베트남 땅으로 출국했다. 전투가 가장 치열한 퀘논 지역에서 지휘관의 소명을 다하면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 적의 포탄 공격을 받고 선두에서 진두지휘하다 명예롭게 전사하셨다.

 

대문간에서 기다린 편지 대신 군수님을 비롯한 면장님, 지자체분들, 이장님은 전사통보를 전하기가 어려워 우리 집 주변만 맴돌다가 이장님이 대문을 열면서 줄을 지어 들어오시는 분들을 보고 아버지는 불길한 생각을 하셨다.


말문을 열지 못하던 이장님이 셋째오빠를 한쪽으로 데리고 가서 이야기를 하는 순간, 온가족은 오열을 하며 곤두박질 치고 하늘을 향해 오빠를 불렀다. 성공하여 돌아오는 날만 손꼽아 헤아리며 정화수 떠놓고 비시던 아버지, 어머니는 기절을 하셨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징용으로 끌려가시던 길에 둘째오빠 얼굴이 떠올라 이 길을 가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 탈출한 기회만 엿보다 탈출하여 평양에서 전북 익산시 망성면까지 맨발로 걸어오셔서 피 묻은 발의 치료보다 둘째오빠를 부둥켜 안고 얼굴을 비비다 기절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가끔씩 하시며, 8남매 중 가장 듬직하게 생각하던 오빠였다.

 

 둘째오빠는 과격한 성격의 무인이 아니었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았던 속 깊은 사람이었다. 불의한 일에 직면하더라도 너그러운 미소로 상대의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히는 천성적인 둘째오빠를 마을주민들은 물론이려니와 면내 주민들, 군민들까지도 아까운 사람을 잃었다며 고생하시며, 둘째오빠를 기다리시다 눈을 뜨신 채로 운명하셨다.

 

 어머니는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장교정북을 입은 군인만 보면 가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따라가셨다. 농사일을 하는 집에서 3년씩이나 농사일도 잊은 채, TV에 전쟁 프로그램이 나오면 채널을 돌려야 했다.

 아들의 전사가 믿기기 않은 아버지, 어머니, 형제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 지친 가족들, 한해 두해 아니 수십 년이 지난 이 시간까지도 오빠의 모습은 우리 가족의 품을 떠나지 않았다. 44년 동안을 하루같이 눈가가 짓무르도록 울다 지쳐도 돌아오지 않은 아들은 기다리신 어머니가 100세가 되셨다.


 아들 오기만 기다리시는 어머니의 마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내 아들이 죽다니”, 하시던 어머니의 기역이 약해지셨다. 발보다 윗몸이 먼저 가는 어머니의 손과 허리를 부축해드리지 않으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극복하시려는 의욕적인 정신력은 아들을 기다리셨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다가도 창밖의 햇살이 따스하게 보이는지 밖으로만 나가자고 어린아이 보채듯 조르신다. 현관문을 열자마다 춥다고 닫으라면 또 열자고 하신다. 어머니의 가슴에 꺼지지 않는 화가 들어있어 그러신 것 같아서 더욱 안타깝다. 차를 구입할 형편이 못되어 어머니 가고 싶은 데를 마음 편하게 모시지도 못하면서 볼일이 있을 때문 넘어지실까 걱정이 되어 문을 잠그고 나오면 마음이 짠하고 죄송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아들이 와서 외식도 시켜드리고 차를 타고 다니니 어머니 표정이 밝아 보이는 것 같았다.

 

 밖의 나들이도 만족하시지만 어머니는 방안에 계셔도 한 자녀는 있으나 마나였다. 7남매를 늘 함께 있고 싶어 하시는 어머니의 한없는 자식사랑은 식지 않았다. 의식이 있는 한 엄마는 자식에 대한 식지 않는 따스한 사랑의 열기로 기다리고 계신다. 8남매의 막내딸 늦둥이가 이순이 넘었어도 어머니 젖 냄새는 잊지 않는다.

  어미닭이 새끼병아리를 품어 날개 죽지가 늘어나도 땅을 헤집어 찾아 먹이를 쪼아놓고 새끼를 부르는 어미닭같이 아들과 딸은 어머니에게는 종종 병아리였다. 이젠 어머니는 아기 병아리, 형제들이 음식을 가져다 드리며 무슨 음식이라고 말씀을 드려도 못 알아들으시는 인고의 세월을 보내셨다.


아들딸은 어미닭이 되어 어머니를 품어드리고 다리가 되어드리고, 귀가 되고, 손이 되어도 마른 목 적시어줄 둘째아들이 간 길은 험 한 산 굽이굽이 돌아오느라 늦으시는지 어머니는 백세가 넘으셨다. 큰 언니내외, 작은 언니, 큰 오빠 내외, 셋째오빠 내외 모두가 기다린다.

 

올해의 새봄이 마지막이 되실는지 자꾸만 헛소리를 하신다. 때로는 당황될  때가 한 두 번이 아닌 노인이 여덟 분이시다. 둘째오빠 내외가 있었으면 열 분 노인의 장수집안인데 안타깝다.

 

우리 집 남자 5형제는 국방의무를 다 마쳤다. 그것도 후방이 아닌 전방에서 칼날 같은 추위와 맞서 한걸음 물러서지 않고 하사관으로, 통신병으로, 장교로, 보병으로 군인으로서 실추되는 일이 없이 영광스럽게 복무를 다 마쳤다.

 6․25를 호되게 치른 유월이면 호국영령들의 돌진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가슴이 쿵쾅쿵쾅거린다. 떠밀리는 군중의 함성소리, 흙더미 밟고 뛰는 소리가 쿵쾅쿵쾅 들리는 것 같다.

 

종전 아닌 휴전의 상황에서 북한은 이제나 저제나 호시탐탐 남침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고 국제정세는 자국이 이익을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이다. 약하면 강한 자에게 굴욕의 지배를 당하게 되어 있는 것이 역사의 현실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세계 정상의 자리에 서 있다.

 
모든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국가가 되어 있다. 오늘 대한민국이 위상에 가장 크게 기여한 집단이 우리 군과 더 나아가 침략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조국을 사수해온 호국 보훈 용사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이 분들의 고결한 삶을 위로해드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더욱 국가 안보를 튼튼히 하고 우리의 조국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선봉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