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시가 ‘문화의 바다’를 만들겠다고 호언했다. 물길을 돌리거나 막아서 바다를 만들겠다는 토목공사(?)의 설계가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계룡시장이 문화를 통한 지역민들의 소통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어 어떠한 결과를 맺을 것인지 궁금한 대목이다.

 

많은 사람들이 ‘문화’라고 하면 어느 특정한 전문 분야로 생각하기 쉽고, 문화활동이란 학술적인 의미나 전문성 있는 예술활동에 많은 무게가 실려 있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문화라는 포괄적 의미는 추상적일 수도 있고, 구체적인 매개를 통한 생활공동체의 소통일 수도 있다.  문화활동이란 삶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의 선택에 불과하다.

 

‘문화’라는 용어는 어느 분야의 용어에 함께 붙여도 그 쓰임새가 가능하다. ‘장례문화’, ‘음식문화’, ‘교통문화’ 등등. 때로는 ‘문화’라는 용어를 아무 곳에나 써먹으면서 품위를 높이려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문화’는 경제적 기반을 우선하지도 않는다. 행정기관과 정치권은 문화의 개념을 단순한 ‘예술문화’나 ‘전통문화’ 등의 창작과 같은 행위로 못 박으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경제적 논리에 따라 문화를 어느 한 분야로 구분하여 관리하려는 속셈이다.

 

‘문화’라는 용어의 쓰임이 어느 때 적절한 것인가는 이해 당사자들이 연구하여 적용하면 그만이다. 문화는 거창하지도 않고 새로 개척해야 하는 대상도 아니다. 그저 우리 삶 한 편에 지속성을 갖고 유지되고 있을 뿐이다.

 

문화의 질적 측면을 논하는 이들도 있다. 정치인이나 행정가들에 의해서 그럴 듯한 논리개발을 위한 볼모에 불과하다. 돈을 쏟아서 문화의 질을 높이거나 창출하겠다는 애매한 의지들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돈을 위한 문화가 될 수는 없다. 경제적인 투자 대 실익으로 계산한다면 어느 누가 문화사업을 기획한다고 해도 문화사업은 적자다.

문화에 대한 가치기준을 점치는 일은 삶의 풍요로움을 보기 좋게 포장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위선일 뿐이다.

 

우리 사회가 문화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는 점에서, 어떠한 문화를 지키고 가꾸어야 하는지만 파악할 수 있다면 용어의 개념은 어려운 미학적 가치를 논하지 않아도 답은 쉽다.

문화의 개념에 대해 설왕설래의 담론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풍요로움이 가득하다는 뜻이다.

인간이 인간을 위한 행위자체가 문화활동이고, 그것을 보조하는 일이 문화사업이다.

 

예컨대,

정치인들이 정치문화를 움직인다.

예술인들이 예술문화를 움직인다.

대중들은 사회문화를 움직인다.

 

국가 및 지방자치단에서 거창한 문화산업의 타이틀을 들고 대중들을 현혹한다. 아무리 돈을 많이 쏟아 부어도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사고의 철학이 부재하면 실패작이다.

 

행정기관의 실패작은 대중들이 용서하지 않는다. 실패작도 문화의 한 단편이라고 위안 삼을 수는 있겠지만, 바다를 만들겠다고 물길을 돌리거나 막는다면 그것은 곧 재앙이다./숲

 

*계간 계룡문화 20011. 봄호(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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