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처럼 고운 여인이 있었다. 청순한 눈매와 지적인 미모는 뭇남성들의 흠모 대상이었다.

 

어느날, 여인은 외출을 했다. 노란 스카프에 빨간 립스틱을 발랐다. 외출에서 돌아온 여인은 화가나는 듯 신경질적으로 화장기를 말끔히 씻어냈다. 그리고 다소곳이 탁자 앞에 앉자 물끄러미 원고지를 바라본다.

깜부기의 첫사랑 시인의 일상을 추측하여,
제정례 작품 이미지는' 화장한 모습은 일상의 모습이 될 수 없다'는 메시지로 함축된다.

처녀가 머리를 따놓은 듯 곱고 균형 있는 시어의 나열들에서 시인의 감수성과 폭팔적인 고백이 긴장감을 주고 있다.

'깜부기의 첫사랑' 뒤쪽에 "제정례의 시는 멀리 바라보는 것이다. 시점이 과거이든 현재이든 미래이든 상관이 없다. 동곡서당의 기왓장이 까맣게 세월을 끌어 안고 가슴을 태우듯이 깜부기 같이 까맣게 세월의 뒤안길로 갈앉은 그녀의 가족의 역사와 사랑의 이야기는 끊임이 없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지난 세월과 가족들이 시에 등장한다지만, 시창작의 평범한 개념에서 볼 때에는 지극히 자유롭고 서정성이 강한 문체의 집합체다.

독자는 시를 감상하면서 시인의 정서를 추측하게 되는데, 시인의 경험적 사고의 흡입과정에서부터 배출에 이르기까지 시인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깊숙한 정서까지  가감없이 담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제정례가 삶의 단편을 예찬하거나, 삶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제정례의 첫번째 시집 '깜부기의 첫사랑'이 창조문학신문사에서 출판되었다. 시인  의 신춘문예 당선작 생채기를 이곳에 내려놓는다./이재수

 

 

생채기

          

숨이 멎은 듯 차갑고
죽음보다 깊은 생채기를
시간이 남몰래 메워 주고 있었다

 

아품이 아픔인 것조차 느끼지 못해
내 아픔 안에는 아무도 없다고
내 자신조차 그 안에 없다고 느꼈던 그 때

 

 

불러야 할 누구도 존재하지 않아
그 누구를 향해 헛손질조차 할 수 없고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도 없었던 그 때
시간만이 주변 정리를 하며 길을 내고 있었다

 

 

그런 시간이 얼마나 갔을까?
나를 닫았던 그 상황이 조금씩 열리면서
앞이 보이기 시작하고
생채기에선 새파랗게 살이 돋고 있었다

 

제정례

 

*제정례: 경남 고성 출생, 신인문학상 당선 등단, 남만시인 공모전 대상, 문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분 당선, 국제시조아카데미 수료,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시조부문당선, 낭만시인협회 회원, 한국문단 이사, 한국시조사랑운동본부 회원, CLN아카데미 문학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