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야기] 계룡에 사는 사람이라면 마르고 닳도록 들었던 이야기들이 대하소설 계룡산 4권 첫장에 나온다.

작가가 소설 속에서 빠져나와 현재의 입장에서 계룡산 주변의 지형과 역사적인 사실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1,2,3권에서 이어지는 줄거리 때문에 독자는 일제시대에 머물고 있었는데 갑자기 현재로 돌아와 당황스러운 점이 있다.

대하소설 계룡산 4권 어쨌거나 계룡산 주변의 지형과 역사적인 사실들을 소개한  자료가 있어 흥미롭다.

마을의 위치가 가늠되지 않는 곳도 있으나 큰 틀로 볼 때 계룡산 자락 동남쪽 마을을 이야기 하고, 그 마을이 현재의 계룡시라는 점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섹스행위 묘사는 4권 정도 읽게 되면 사전에 독자가 "곧 섹스행위가 진행되겠구나"라는 추측과 "누구와 누가 섹스하는 장면이 묘사될 것"이라는 추측까지도 가능하다.

섹스행위 묘사 부분에서는
독자가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를 미리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 많아 긴장감이 덜 하다. 이 책의 흠결사항으로 보인다./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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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소설 속에 계룡시 일대를 묘사한 부분을 이곳에 옮긴다-

충청도땅 공주, 대전, 논산을 연결하는 세모꼴의 거의 중간쯤에 계룡산이 있다. 이 산은 해발 827미터의 산으로서 근처에는 계룡산 주봉(主峰)을 떠받들듯 높고 낮은 여러 개의 산이 깔려 있다.

계룡산 산상에는 바위에 <방백마각 구혹화생(方百馬角 口或禾生)>이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어느 때에 누가 새겼는지, 또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 여덟 글자는 무엇인가를 예언하고 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것은 벌써 계룡산 대의 심상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원래 이 근처는 옛적에 백제의 땅이었다. 그후에 신라의 힘이 강해짐에 따라 신라의 영도가 되었었다. 또 세월이 흘러 고려의 판도 안에 들게 되었다. 고려라고 하면 누구나 잘 아는 저 유명한 <고려청자>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고려청자가 어디서 어떻게 구워졌을까 하는 것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고려청자를 구워냈으리라고 믿어지는 요지로서 오늘날 알려진 곳이 여러 곳 있다. 계룡산의 산기슭 일대에서 고려청자의 요지가 발견되어 우리에게 알려진지는 이미 오래되었다.(밑줄 그은 부분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가가 일제시대에서 갑자기 현재의 입장에서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세워졌을 때 태조는 이제까지의 서울인 송도를 버리고 새로운 곳에 서울을 옮기려고 하였다. 여기서 후보로 등장한 곳이 계룡산 밑이다. 이는 당시 정당문학(政堂文學) 벼슬을 하던 권중화(權仲和)가 <계룡산 도읍도라는 것을 바침으로써 구체화하였다. 권중화는 당시 유명한 상지관(相地官)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주장이 채택된 것이다.

태조는 즉위한 다음해 2월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계룡산 밑에 이르러 자세히 지형을 조사하고 이곳에 신도(新都, 즉 새로운 서울을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곧 공사는 시작되었으나 한 일년이 지난 뒤 이곳은 버려지고 지금의 서울, 즉 한양(漢陽)땅으로 서울이 결정되었다.

지금도 계룡산 밑 일대에 흩어져 있는 거대한 돌들은 그때 대궐의 기초로 쓰고자 마련되었다가 버려진 것이라고 한다.

오늘도 이 일대를 <신도내>내 <신도안(新都安)>이니 하고 부르는 것은 태조 때 붙었던 <신도>라는 말이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그후 항간에 흔히 떠도는 것에 <정감록>이라느 것이 있었다. 이것은 일종의 예언서로서 난해하고 기괴한 문자의 나열로 이룩된 것이었으나, 결국 조선왕조 다음에는 <정씨(鄭氏)>가 임금이 되고 계룡산 밑에 도읍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계룡산 일대를 신비시하고 중요시하기에 꼭 알맞은 역할을 하였다.
조선왕조 말엽의 사회적 혼란과 이에 따르는 일본의 탄압 착취는 현실 도피와 무릉도원을 찾고자 하는 생각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기에 계룡산 일대에는 이 세상의 이치를 말하고 내세(來世)를 운운하는 따위의 황당무계한 무리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계룡산 일대가 흔히 말하는 바와 같이 과연 피난처가 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큰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높고 낮은 산들이 널려 있는 골짜기들은 속세의 눈을 피할 만하였고, 그들대로의 세계를 전개할 만도 하였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냐는 것은 쉽게 외부 세계에 알려지는 것이 아니었고, 고작 알려져야 할 외형적인 것뿐이었다.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계룡산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는 갖가지의 <교(敎)>라고 이름지어진 것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서로 아무 연관도 없으며 제각기 자기만이 모든 진리와 이치를 깨달았다고 하는 무리들이었다.

계룡산 줄기 봉우리 중의 하나가 무지개봉이니, 밋밋한 능선으로 일곱개의 봉우리로 이룩되어 마치 병풍을 둘러친 것 같다. 이 무지개봉 남쪽에 학선리(鶴仙理)라는 마을이 있었다.

마을 앞에는 개울이 흐르는데 어찌나 물이 맑던지 바닥의 조약돌이 들여다 보이고, 여름이면 송사리떼가 거울 속 같이 보였다.

개울을 따라 남쪽으로 내겨가면 오리나뭇골로 들어가는 갈림길이 있고 더 내려가면 쌍범리이고, 여기서 더 남쪽으로 시오리를 가면 삼거리가 되었다.

삼거리란 진잠, 회덕 방면으로 가는 큰길과 학선리 쪽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이 가릴는 곳이었다. 동에서 서로 또는 서에서 동으로 오가는 사람은 꽤 있었으나 학선리 쪽으로 접어드는 작은 길로 꺾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러면서도 으레 삼거리에 이르면 나그네들은 쉬어 가게 마련이었다. 여름이면 나무 그늘에서 땀을 들이고 겨울이면 따끈한 국과 탁주를 하는 곳이 삼거리였다.

쌍범리 뒷산은 울창하게 소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별로 높은 산은 아니었으나 꽤 가파르고 바위가 많았다.

오솔길을 따라 산을 넘으면 골짜기가 되었고 거기도 소나무가 울창하였다.

골짜기를 따라 내겨가면 작은 개울이 흐르고 펑퍼짐하고 널찍한 곳이 된다. 여기는 나무꾼들이 한잠씩 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가는 곳이기도 하였다. 마을도 없는 곳이었으나 누구나 다 굿터라고 부르고 있었으니, 예전에 산신을 위로 하는 굿을 하던 곳이라고 하였다.

학선리나 굿터는그저 보잘 것 없는 빈한한 마을이거나 빈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이 계룡산 일대는 물론이거니와 멀리에서까지 학선리와 굿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학선리에는 <상상교(上上敎)가 있기 때문이며, 굿터에는 <無極天敎>가 있기 때문이었다./김용구, 대하소설 <계룡산> 4권(자유문학사) 9~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