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랑"상놈정신의 나쁜 점은 졸부근성이다. ‘남이야 죽건 말건, 내 배만 부르면 장땡이다’는 의식이 바로 상놈의식이다. 이 부정적 의미의 상놈의식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

[책이야기] 문화재청에서 발행하는 '문화재사랑' 2009년 1월호 특집 '고택을 재발견하다'에서 조용헌(컬럼니스트)님이 쓴 글(사진은 이상무) 중에 논산 명재고택에  관한 글이 있어 소개한다. 
글의 주요내용은 역사적으로 존경받았던 명문가들은 공통적으로 '나눔의 실천'을 대물림 했다는 내력을  소개했다. -i계룡신문-


정승도 따르지 못했던 한 명의 처사

명재고택충남 논산의 노성리에 가면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3) 고택이 있다.  함향 개평에 있는 일두 정여창 고택과 더불어 가장 보존이 잘 되어 있는 고택이 명재고택이다. 이 집안은 보통 노성(魯城) 윤씨(尹氏)라고 부린다. 충청도에서 1급 양반으로 꼽히던 집안이 회덕의 송시(우암 송시열 집안), 광산 김씨(사계 김장생 집안), 그리고 노성의 윤씨 집안이다.

명재는 벼슬을 거부한 처사(處士)로 유명하다. ‘정승 세 명이 대제학 한 명만 못하고, 대제학 세 명이 처사 한 명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처사는 벼슬을 하라고  해도 하지 않고 초야에 뭍혀서 공부하는 선비를 가르킨다. 명재는 임금이 40번 넘게 벼슬하라고 불렀어도 끝내 벼슬을 거부한 학자다. 마지막에는 임금이 명재 얼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우의정을 준다고 했지만 이것도 거부했다. ‘탕평인사’라는 명분에 맞지 않는 벼슬은 절대로 받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처사는 두 명 있다고 한다. 명재와 지리산 밑에 살았던 남명 조식이다. 명재가 지명재고택닌 카르스마는 대단하였다. 그만큼 주변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소론(少論)의 당수로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명재는 자기가 죽은 뒤에 제사상의 크기도 미리 정해 놓았다. 제사상의 크기를 가로 세로 석자(90cm)를 넘지 말게 하라는 당부였다. 음식을 간소하게 차리라는 당부였던 것이다.

지금도 명재 고택에 가보면 석자 안되는 제사상이 남아 있다. 음식 몇 가지 올리면 상이 다 차버린다. 당시에 명재 집안의 윤씨들이 뽕나무 사업이 잘된다고 하니까 너도 나도 뽕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를 안 명재는 “우리 집안은 뽕나무를 키우면 안 된다. 이는 가난한 서민들이 먹고 살기 위해 심는 나무인데, 우리 같은 양반 집안마저 뽕나무를 키우면 다른 사람들은 어찌 되겠느냐, 절대로 뽕나무를 심으면 안된다”고 엄명을 내렸다. 윤씨들은 이를 그대로 지켰다.

명재고택현재 남아 있는 명재 고택도 사랑채에 담장이 없다. 대문도 없다. 외부인이 곧바로 사랑채에 접근하거나 쳐다볼 수 있는 구조다. 집안이 담벼락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집안은 거리낄 것이 없다’는 표시다. 이 집안의 이러한 가풍이 있었기 때문에 6•25 때에도 이 저택은 불이 타거나 손상당하지 않았다. 충청도 양반을 대표하는 집안이다. 

우리나라는 조선조가 망하면서  양반도 몰락하였다. 양반들도 약자를 착취하는 토색질을 많이 하였다. 하지만 양반의 나쁜 점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좋은 점도 같이 사라졌다. 양반의 자존심과 주변을 배려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같이 사라진 것이다. 해방 후에 남은 것은 ‘상놈정신’이다. 상놈정신의 나쁜 점은 졸부근성이다. ‘남이야 죽건 말건, 내 배만 부르면 장땡이다’는 의식이 바로 상놈의식이다. 이 부정적 의미의 이 부정적 의미의  상놈의식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조용헌, 문화재사랑 2009 January•9,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