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하고 패악한 강도의 습관을 엄하게 ...

 

향적산 국사봉 주변(아래)에 위치한 향한리(1,2리)에서 1870년 조직된 것으로 알려진 ‘송계’가 있다. 현재까지 향한리 송계는 주민들에 의해 맥을 이어오고 있지만,  본래 송계는 한자 그대로 ‘소나무계’를 뜻하는 것으로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산을 관리했던 조직이다.

 

송계는 주민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산림자원(목재, 땔감, 비료 등)을 부락단위로 공동운영하면서 이를 실생활에 필요한 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송계의 흔적이 남아 있는 대표적인 곳으로는 태안 안면도 일대의 송계를 볼 수 있는데, 안면도에 소나무가 많은 이유가 해당 지역 송계 조직에서 소나무를 특별히 관리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향적산송계는 후손들을 위해 필요한 만큼 나무를 자르고 나면, 그곳에 다시 식재를 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었고 산에서 나오는 자원들은 마을의 공동재산으로 삼았다.  송계조직이 있는 마을은 송계의 총회가 주민 삶을 책임지는 최고의 의결기구였을 정도로 권한이 막강하였다.

 

향한리 송계는 향적산 무상사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그 일대의 산림을 공식적으로 관리했다.

 

송계는 산업화를 거치면서 연료의 변화와 생필품 등의 공산품화로 본래의 기능적 역할의 변화로 이어졌다. 지금의 향한리 송계는 마을의 공동재산 및 대소사를 관리하는 평범한 기능을 하고 있다.

 

106년 전, 향한리 송계에서 관리하던 향적산 일대의 산림을 호시탐탐 노렸던 엄사리 송계의 기록이 강성복 박사(역사민속학)가 소개한 자료가 있어 이를 소개한다.

 

때는 1904년, 향한리 주민(송계원) 수십 명은 관청에 엄사리 주민들이 향한리 송계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취지의 진정서(-다음1-)를 접수하게 된다. 진정서 내용과 이에 대한 관가의 결정내용(-다음2-)을 살펴보면 국사봉 아래의 송계 영역을 다투는 소송이 길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진정서 내용 일부의 표현들이 재미 있기도 하고,  격이 있기도 하고,  분한 마음을 가감 없이 그대로 표현한 부분도 보인다. 

 

-다음1-

뜻밖에 수십 년 전 두마면 엄사리 주민들이 무엄하게도 산천에 욕심을 부려 그 중 남쪽의 한 기슭인 석령(石領) 한 모퉁이를 사사롭게 저들의 송계산이라고 하면서 세력을 끼고 근거 없는 것을 내세워 누차 진정서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엄사리에서 석령은 다른 면일 뿐 아니라 또한 세 봉우리를 넘고 두 두렁을 건너야 하고 그 사이에 또 다른 사람의 사산(私山)이 있으니 진실로 이른바 나루를 건너서 배를 타는 격입니다.

 

고을에서 공정한 판결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아! 저 미련한 사람들이 악한 습관을 고치지 아니하고 매번 소란을 피우다가 끝내는 사정하여 말하기를, “우리 동네 송계산이 중산골(中山谷)에 있으니 곧 한 고을에 사는 정의를 헤아리고 또 소란을 없애기 위해 합동으로 금양(禁養)하고 상호간 발령(發令)을 내려 작벌(斫伐)을 한다면 심한 폐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동중의 몇 사람이 허락을 하되 만약 위절(委折)을 할 것 같으면 그 즉시 중산골을 영원히 차지한다는 뜻으로 약속을 했습니다.

 

-엊그제 우리들이 발령을 내어 동중에서 작벌할 때 엄사리 주민 50~60명을 불러 모아 돌발적으로 달려와서 불문곡직 지게를 부수고 낫을 빼앗고 구타하고 꾸짖어 욕을 보이며 갖가지 나쁜 짓을 하니 세상에 어찌 허가 낸 도적의 심보가 이와 같겠습니까? 분함을 참을 수 없어 이에 감히 저번 고소장을 연해 부쳐서 한 목소리로 우러러 고하노니 엎드려 바라건대 통촉하셔서 윗마을 엄사리 주민들을 관리를 파견하여 잡아가되, 우선 미련하고 패악한 강도의 습관을 엄하게 다스려서 징치하고, 그 지게 값과 탈취한 낫값을 물려서 우리들의 생활하는 터전을 불량한 무리들에게 빼앗김 당하는 일이 없도록 성주합하께 천만읍축(千萬泣祝)하오니 처분을 내려주십시오.

 

-향한리와 엄사리의 소송에 대한 결과는 -다음2-과 같다.

 

-다음2-

 

피고 등이 원고들의 고소에 응한 바 리중(里중) 송계에 석령 전체가 본시 향한리 소유의 수호지이다. 그런데 근래에 엄사리 주민들이 비밀리에 송계입안(松契立案)을 만들어 부당하게 송사를 하는지라 과연 이웃 동네의 호의로 계를 같이 하여 금양을 했다. 수십 년래로 저들이 옛날부터 중산골에 있는 소나무를 날마다 베어가서 민둥산이 되었고 석령에 있는 나무는 송계를 함께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장차 다 탈취하려고 관가 법정에서 소란을 피움에 군청에서 조사해 보고한 지령에 엄사리는 지경을 건너 뛰었고 산등도 멀리 떨어진 곳이라 했으니 마음대로 고개 이남을 다 주간하고자 할 것 같으면 어느 산인들 그 수중에 들어가지 않겠는가! 향한리는 집 뒤 마을 위일 뿐 아니라 박씨와 주씨가 송사를 하던 문적이 있고 또 이전의 관장(官長)이 친히 판단한 문안이 있으니 다시 논할 필요가 있겠는가.

 

지난번 발표한 결정에 의해서 영구히 떠들지 말 것이고, 이씨들(당시 엄사리는 전주이씨 집성촌)은 엄중히 경계해서 다시는 송사하지 아니함이 옳을 것이고 계속해서 부쳐온 원고의 정의(呈議)는 지시한 법령에 전번의 제사(題辭)가 있는데 어찌하여 정당한 것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다시 진정서를 올리는가. 곧 잡아와서 판결서를 붙여주니 시비한 문적은 없애버리고 영원히 타협한 후에 보고해 올 것이며, 고을에서 공정한 판결을 내렸으니 피고 등은 스스로의 잘못으로 돌려서 다시는 시끄럽게 할 뜻이 없음을 관가에서는 자복한 이유가 있음을 받아들이노라. -(강성복, 「‘산림문화’의 진수 국사봉 송계와 동제」, 계룡시 향한리, 민속원, 2010. 5.에서 발췌)

 

 

계룡시의 각 마을별로 어떠한 이익과 관련하여 크고 작은 분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마을과 마을의 분쟁은 주민들이 부리고 있는 땅( 농토)이 넓은 마을에서는 개인과 개인의 분쟁에 불과한 정도인데, 계룡시 각 마을들은 땅이 좁다 보니 마을마다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엄사리와 향한리는 역사적으로 소나무 영역싸움을 벌이던 숙적 관계였던 것만은 틀림 없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