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미술관과 화랑 몇 군데 돌아다니는 외로운 여행에 실증이 났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여행사 관광버스에 몸을 던졌다. 이른 아침 L.A. Olimpic가에 있는 여행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미국의 금상산이라고 하는 요세미티로 가기 위해서였다.

 

찾은 여행사에서 계획한 일정은 첫날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오전 9시에 출발하기로 한 버스가 손님 서너명이 도착하지 않아 버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말끔한 정장차림을 한 여행사 가이드는 일찍 시간 맞춰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 손님들에게 넓은 아량을 호소하며 늦게 오는 서너명의 손님을 줄기차게 기다리고 있었다.

105번 프리웨이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은 벌써부터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미국에 체류하면서 몇몇 되지 못한 교포들에게 느꼈던 일들을 관광버스 안에서 또 되풀이되고 있었다.


어째서 자신들의 이익 앞에서는 같은 한국사람이라 하여도 매정하고 악착같이 미국식으로 손을 내밀면서 아쉬울 때는 같은 한국사람임을 강조하며 슬그머니 묻어 넘어가려는 속셈들을 가지고 있는지... 한편으로는 그런 정서들이 안타깝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야 하는 사회라면 인내심의 확장을 더하여 그냥 너그럽게 이해하고 넘길 수 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40여명을 태우고 있던 관광버스는 1시간이나 늦게 온 손님 몇 명을 더 태우고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 안 관광객들은 운전기사를 빼고 모두 한국인들이었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젊은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고 Bob이라는 미국인 운전기사와 자신을 소개하고 2박 3일간 여행 일정을 소개했다.

 

버스는 LA를 벗어나기 위해 105번 프리웨이를 몇 분 달렸다. 10분쯤 달렸을까? 갑자기 차가 멈췄다. 바로 코 앞에서 앞서가던 큰 트럭이 사고를 일으켜 꼼짝없이 버스는 길 위에서 시간을 버리고 있었다. 대형사고라서 수습하는 시간이 1시간 넘게 이어졌다. 버스 안 관광객들은 여행사의 늑장 출발을 원망했다. 미국식으로! 늦게 오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출발했다면 앞서 일어난 사고를 피해 여행일정에 차질이 없었을 것이라며 불평하기 시작했다. 손님 몇 명 더 태워 돈을 더 벌겠다는 여행사 속셈에 애꿎은 관광객들 속만 끓게 했다.


이미 남은 시간으로는 도저히 요세미티에 도착하기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사고수습이 끝나자 다시 버스는 달렸다. 끼니도 거른 채 무조건 달리기만 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은 넓고 둥실둥실한 황무지 사막과 간간이 오렌지나 포도농장만 보일 뿐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었다.

 

오후 4쯤 버스는 어느 휴게소에 도착했다. 그곳이 여행사에서 예약한 식당이 있는 곳이었다.
 모두가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꾸역꾸역 점심을 챙겨먹었다. 밥을 먹자마자 물 마실 시간도 주지 않고 버스는 또 달렸다. 버스 타러 여행사를 찾았는지 궁금할 정도로 하루 종일 버스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첫날 여행일정이 엉망이 되었으니 사람들은 여행에 대한 기대감보다 허탈한 표정들로 가득차 있었다. 기대했던 여행일정은 첫날부터 도루묵이 된 채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방에 들어서며 나는 함께 이틀을 자야하는 룸메이트를 찾았다. 버스에서는 미국유학 1년차라는 여대생하고 동석을 했기 때문에 누가 룸메이트인지는 모르고 있었다.


호텔로비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등 뒤에서 누가 어깨를 툭쳤다.
고개를 들어 돌아보니 머리가 희긋한 어느 할아버지가 멋적게 웃으며 서 있었다.

설마 할아버지가 내 룸메이트?

 

“이재수씨죠? 내가 자네하고 함께 방을 쓸 사람이라네, 가이드가 자네 따라가면 된다고 그러네. 혼자 자면 어떻하나 했는데 잘 되었구려, 갑시다 방으로...”

 

'으악!!! 안돼! 안돼! 나는 절대 안돼! 뭐가 이렇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거야! 도대체 젊은 사람들 다 어디로 가고 할아버지와 룸메이트를 해야 되는 거야?'

 

우리는 예약된 호텔방을 찾아 들어갔다. 호텔은 침대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텔급 정도라면 그 수준이 엇비슷함직하다. 호텔방은 청소를 한 것 같으나 그리 깨끗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봐! 미스타 리!  텔리비좀 틀어 봐”


방 안에 들어오자마자 할아버지는 손주 녀석 심부름 시키듯 자질구래한 일들을 시키기 시작했다. 여기서 미국식으로 ‘너는 너! 나는 나!'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어설프게 미국 사고를 흉내내는 한국인은 되고 싶지 않았다.


낮에 비좁은 버스에서 고생을 많이 했던지 너무 피곤했다. 짐보따리를 풀고 나서 할아버지가 먼저 샤워를 했다.

할아버지는 샤워를 끝냈는지 수건으로 물기를 털며 목욕탕을 나왔다. 그런데 샤워를 하고 나오면서 무슨 불만이 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목욕탕 하수구 막혔나벼? 물이 안 내러가네? 그리고 미국 여관은 왜 쓰레빠가 없는겨?”

 

호텔 목욕탕 바닥이 타이루가 아닌 목조로 된 마루바닥이었는데,  목욕탕에서 물이 빠져 나가는 구멍은 세면대 구멍과 커튼을 걷고 들어가야 하는 욕조 구멍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욕조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지 않고 마루바닥 위에서 물난리를 만들었던 것이고, 곧바로 아래 층까지 물이 새나간 모양이었다.

 

나는 밤새 할아버지가 목욕탕 바닥에서 퍼질러놓은 물을 수건으로 걷는데 꼬박 두 시간을 소비했다. 그 사이 호텔 지배인이 쫓아와 씩씩거리는 소리를 듣고 할아버지는 무서워서 재빠르게 어디론가 도망가 있었고, 나는 덩치가 황소만한 흑인 지배인의 신경질 앞에서 "아임 쏘리"를 연발했다. /